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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소설 서평 /한국 현대 소설

홍어 - 김주영


『홍어』는 매력적이고도 특이한 소설이다. 그것의 매력은 이 소설이 일종의 성장소설이며, 성장의 주체인 어린 주인공의 세상 보는 관점과 그것의 변화를, 어른의 눈에 의한 왜곡이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온다. 저급한 성장소설들은 어린 주인공과 어른들 간의 갈등을 성급하게 부각시켜 두 세계를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이분하거나 주인공의 일탈 충동을 극대화해서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성인의 활약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것들은 의문과 발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의 체험적 재확인만을 생산한다. 그것들은 성장소설로 포장된 통속소설들이다. 물론 모든 성장소설에는 성인 세계와의 갈등이 있고, 세계로부터의 일탈의 충동이 있다. 『홍어』에도 주인공과 어른들 세계의 갈등은 있으나,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성을 동반하고 있어서,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성장의 <모험>(알 수 없는 세계의 탐험)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홍어』의 주인공 역시 일탈 충동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으나, 현실적 불가능성을 보상하고자 하는 상상적 창조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독자를 생각이 계속해서 열려나가는 놀이 속에 참여케 한다(아이가 현실적 불가능성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론이다. 아이의 <놀이>는 현실적 충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순간 시작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품의 미덕은 작가가 말의 권리를 인물에게 그대로 넘겨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실로 여기에는 작가의 어떤 예단도 재단도 없다. 모든 생각과 진술이 오직 어린 주인공 <나>의 뇌를 경유해서만 <나>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에, 독자가 읽는 것은 <나>의 확신과 오인의 지속적 교대이다. 가령, 이 문장을 보자:

나는 진작부터 발견하고 있었던 한 가지를 어머니는 경황중에 지나치고 있었다./그것은 사람들이 가오리라고 말하기도 하는 홍어였다.(p.19)

<경황중에 지나치고 있었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개입된 사실 판단처럼 읽히는데, 실은 <나>만의 순수한 목소리다. 그 어조의 단호함은 어머니가 <아버지로 상징될 만한 [그] 건어물>이 사라진 것을 정말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도록 독자를 유도한다. 그래서, <나>가 <홍어의 부재를 어머니가 눈치챌 수 없도록> <황급히 열어둔 채였던 외짝문을 닫>(p. 23)았을 때 어머니의 무지는 불변의 사실로 굳어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은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엌의 침입자가 그걸로 <저녁 요기까지 든든하게 했>(p.29)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이 판단 자체가 나중에 다시 부정된다. 그 침입자에게 <삼례>라는 이름이 주어지고 그녀가 식구가 되고 난 한참 후에 내가 물어보자 삼례는 일거에 부인하는 것이다:<하지만 난 그 홍어 모른다. 배가 고팠다 할지라도 그 짜고 못난 홍어 한 마리를 내가 무슨 재간으로 먹을 수 있겠니>(p.63).
이렇게 <나>의 세상 이해는 이렇게 거듭되는 예측의 배반, 혹은 좀더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기대 지평의 배반으로 요동한다. 여기에는 <늙은 여우처럼, 실수를 낳지 않는 판단력과 예민함으로 다져온 귀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p.122)의 표현들과 <그러나 어머니의 짐작이나 내 짐작 모두가 빗나가고 말았다>(p.72)는 식의 착오에 대한 쓰디쓴 인정, 그리고 이 확신과 배반의 결과인 <어쩌면 (……) 때문인지도 몰랐다>는 식의 판단의 주저가 되풀이해 순환하고 있다. 이런 순환을 낳은 요인은 바로 전지적 화자는 물론이거니와 순수 관찰자로서의 화자도 없다는, 즉 어떤 객관적 화자도 없다는 구조적 특이성에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나>가 화자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가 전지적 화자라면, 판단 착오를 했을 리가 없고 그가 순수 관찰자라면, 자신의 판단을 작중 속에 개입할 리가 없다. <나>는 판단과 착오에 의해 작품 속에서 실존적인 기쁨과 고통을 느끼며,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작품 <안에> 살아 있다. <나>는 화자가 아니라, 정확히 <하나의> 인물이다. 그러니, 이런 지문이 가능한 것이다.

구름 위에선 세상의 모든 것을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 어머니가 옆집 남자를 흠모하게 된 수수께끼 같은 까닭도 알아낼 수 있는 명징한 눈도 가질 수 있었다.(p.247)

어머니가 옆집 남자를 흠모하는 게 마치 사실인 듯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나>의 상상적 의혹일 뿐이며, 그것이 <나>의 환각 속에서 사실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지문의 어디에도 사실을 전달하는 객관적 화자의 목소리는 없다. 이 작품의 지문과 대화들은 오직 인물들만의 것이다. 그것도 정황의 한복판에 있는 인물의 목소리이다. 다시 말해, <있었다>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지문의 중심 어체인 <∼ㅆ다>체는 회상의 형식을 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사의 문체이며, 대화는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외의 다른 인물들이 작품에 참여하는 말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실질적으로 지문과 대화 사이에 경계가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저마다 살아 있다(따라서, 지문은 해설이 아니라, 또 하나의 대화언어이다). 작가는 인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한다. 지문과 대화들은 두루 <정황의 배후에 놓인 시선(vision derri럕e)>, 즉 규정적 시선이 아니라, <정황과 함께 하는 시선(vision avec)>, 즉 참여적 시선과 함께 생성된다. 그것들은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정보의 발견과 창출에 가담케 한다.
『홍어』의 매력은 또 있다. 앞에서 인용한 삼례의 부인은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난 그 홍어 모른다>는 <난 그 홍어 안 먹었다> 혹은 <난 그 홍어 보지도 못했다>와는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것은 <홍어가 이미 내 뱃속에 들어갔으니, 어쩌겠느냐>는 뻗댐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게다가 이어지는 발언은 독자의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는 한편, 홍어를 먹은 자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의문의 공간을 창출해낸다. 홍어가 <짜고 못났>는지 삼례가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전에 홍어를 보았거나 들은 경험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홍어가 바닷고기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것을 먹어보기까지 했을까? 삼례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는, 게다가 그녀가 거지의 행색으로 도착했음을 알기 때문에, 그 대답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홍어는 <산골마을에서는 거리감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머나먼 흑산도나 백령도라는 섬지방에서 잡힌다는>(p.19) 희귀한 고기 아닌가? 나중에 낯선 여인이 동생을 안고 집에 나타났을 때, 그 아이의 목에 매달린 고기는 홍어가 아니라 북어였다(p.181). 이 또한 북어가 흔하다면 홍어는 귀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내비친다. 그러니, 의심을 간직한 채로 그 발언을 되풀이해 읽으면, <배가 고팠다 할지라도 그 짜고 못난 홍어 한 마리를 내가 무슨 재간으로 먹을 수 있겠니>는 <내가 무슨 재간으로 ‘다’ 먹을 수 있‘었’겠니>라는 발언의 의도된 오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당연히 생길 수 있다. 분명 그녀는 부엌 문설주에 걸려 있던 홍어에 입을 댄 게 아닐까? 입을 대긴 했으나 너무 짜서 다 먹지 못하고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버려진 홍어를 누가(누룽지가? 혹은 족제비들이?) 물고 간 것은 아닐까?
『홍어』의 매력의 이차적인 요인은 이처럼 생각의 풍요를 가능케 한다는 데에 있다. 말들은 현상에 의미를 고정시키는 쐐기가 아니라, 다른 생각들과 말들의 발생기이다. 몇 개의 예를 더 들어보자. 가령, 삼례가 홍어를 먹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저 년은 저녁 요기까지 든든하게 했을 끼다. 밤새 부석 앞에 앉아서 홍어 한 마리를 꿉지도 않고 몽땅 묵어치웠드라>라고 말함으로써 드러낸다. 여기에서 독자가 얻는 정보는 단순히 삼례가 홍어를 먹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부석 앞에 앉아서 홍어 한 마리를 꿉지도 않고>는 아궁이의 불에 홍어포를 굽는 군침 도는 광경을 선명하게, 사투리의 리얼리티에 힘입어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독자는 본 이야기의 전개와 관계 없는 가외의 장면에 참여하고, 이 장면의 생생함은 홍어를 둘러싼 본 이야기의 전개에 짜릿한 긴장을 덧붙인다. 또 다른 예:

「쌍년, 잡히기만 해봐라. 그 피둥피둥한 가랭이를 콱 찢어놓을 테니깐.」(p.118)

삼례에게서 버림받은 사내가 집에 찾아와 하는 말이다. 얼핏 돈까지 훔쳐 달아난 여자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만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피둥피둥한>이라는 단어가 왜 끼여들었을까? 보통은 <가랭이를 콱 찢어놓을 테니까>라는 말로 충분하다. 그런데, 의미론적으로 불필요한 단어 하나가 끼여들어감으로써, 사내가 삼례에게 분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녀의 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노출하고 있다. 게다가 지시사 <그>는 그 몸에 실재성의 환각을 일으킨다. 그 단음절 하나가, 저기에 삼례의 몸이 있다;<그> 가랑이는 피둥피둥하다;나는 욕정에 불탄다,는 마음의 장면을 순간적으로 연출한다. 그러니, 가랑이를 콱 찢어놓겠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아니면 성적인 다른 욕망의 표현인지 독자는 무척 궁금해진다.
이렇게, 『홍어』의 언어는 지시사가 아니라 촉매이다. 말들은 말들을 부른다. 『홍어』는 말들의 환몽 속에 있다. 이 서로를 불러 무한해지는 말들의 환몽은 독자를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상상의 늪 속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이 풍요는 동시에 처절한 가난을 감추고 있다. 이 환몽은 죽은 물고기들이 둥둥 떠 있는 소택지의 탁한 물을 대립자이자 등가물로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없는 채로 산골 마을에 갇혀 살고 있는 한 아이의 절망적 감정이 감추어져 있다. 그 가난은 육체적으로는 굶주림이고 사회적으로는 아비 없는 자식의 부끄러움이고, 개인적으로는 성인의 사회에 참여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설움이라는 실제적 항목들을 달고 있다. 그 항목들 중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지막 항목이고, 선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드러나 있는 것이 두번째 항목이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 <나>는 방천둑의 자작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깔때기처럼 만들어 입에 댄 다음, 마을 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지>른다. <이 새끼들아, 우리 아부지가 온다 카이>(p.271). 그리고 첫번째 항목은 완벽하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깊이 감추어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징후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선, <나>를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옆집 개의 이름이 하필이면 왜 누룽지인가? 누룽지는 단순히 <나>를 좇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광경은 누룽지가 나에게 그 이상의 기호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숨 가쁘게 헐떡거리고 있는 누룽지는 지칠 대로 지쳐서 늘어진 혀끝이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옆구리는 풀무질을 하는 것처럼 벌럭벌럭 물결치고 있었고, 입 언저리에는 엉킨 거미줄 같은 흰 거품이 길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주둥이를 처박은 가슴털은 그래서 걸쭉한 침으로 젖어 있었다. 낯선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짖을 기력을 잃은 누룽지는, 몸을 대문턱에 내던지고는 새삼스럽게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p.120)

삼례의 사내가 출현한 날, 옆집 사내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내가 뛰어갔다 왔을 때 함께 동행한 누룽지에 대한 묘사이다. 그런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정경이다. 아무리 빨리 달렸다 하더라도 개가 이 정도로 헐떡거린다는 것도 이상한 일일 뿐더러, 헐떡거리기로 하자면, 누룽지보다 내가 더 심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의 상태에 대한 묘사는 그저 <초인적인 속도감으로> <가쁜 숨을 진정시킬 사이도 없이> 달려갔다 왔다고 기술될 뿐이다. 현실성을 고려한다면, 누룽지의 헐떡거림은 나의 헐떡거림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라고 해야 타당하다. 다만, <나>는 그것이 나라고 말하기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어지는 구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래야만 콘도르를 닮은 그 사내에 대한 공격성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가 키운 수탉을 누룽지가 물어 죽였을 때, <나>는 <동료애와 쾌감>을 느끼고, <솔직한 속내 같아서는 누룽지를 끌어안고 방천둑 눈발 위라도 구르고 싶었다>(p.255)고 토로했던 것이다. 그러니 누룽지는 나의 심리적 대리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개의 이름이 <누룽지>라는 것은 나의 현실적인 고통이 먹거리와 연관되어 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또한, 유달리 <먹거리>의 토포이가 많다는 것도 그 암시를 강화해줄 것이다. 우선 제목인 <홍어>부터가 그러하고, 소설의 첫 무대가 <부엌>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세영이 사팔뜨기 눈은 아직 고치지 못했군>(p.291)이라며 돌아온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것이, <밥상 위에 놓인 은수저를 들> 때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지독하게 매운 고추를 먹었을 때처럼 고통스러움을 통한 파괴적 쾌감이 있었다>(p.58)나, <면상이 수수떡처럼 검붉은 그 사내>(p.110), <배춧잎처럼 부푼 담청색 치마>(p.290) 등 먹거리의 비유는 아주 빈번하고 아주 구체적이다. 그것들이 구체적이라는 것은, 산골의 가난한 살림의 먹거리들로서, 그 자체로써 굶주림을 환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나타난 동생의 목에 걸린 북어포에서 <나>가 받았던 느낌은 어떠한가? <기초 언어동작도 미숙할 그 아이가 씹지 말고 핥기만 하라는 야비한 저의가 숨어 있는 훈련과정을 거쳐 버릇으로 정착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폭력적인 독려를 이겨내며 씹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씹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력을 시험받아야 했을까>(p.183).
이상의 표지들은 배고픔, 혹은 허기의 주제가 작품의 표면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나, 작품의 내핵에 깊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암시하고도 남는다. 깊이 감추어져 있으나 때로 그것은 엉뚱한 장소에 출몰한다. <나>에게 자주 발생하는 환각의 한 체험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나>는 <배고픔은 언제나 꿈에다 날개를 달아주었다>(p.126)는 말을 엉뚱하게(즉, 줄거리의 전개와 관계없이) 흘렸던 것이다. 환각은 실재계와 직면하는 자리라는 정신분석의 이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뜬금없는 발언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 욕망의 편린을, 도둑이 흔적을 남기듯이, 꺼내놓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삼례와 아버지가 똑같이 가지고 있고, 그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홍어>라는 별명이 붙은, <흰 어루러기>(p.35)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이중의 발견이 있다. 우선, 『홍어』의 매력이 말의 생기(살아 있는 말들)와 말의 풍요(말이 말을 부르는 말들의 나선형적 순환)에 있다면, 그 생기와 풍요를 낳은 것은 바로 현실의 가난이다. <나>의 환몽은 <[현실에서] 무력해서 달콤한 부유감>(p.247), 즉 무력하기 <때문에> 달콤한 부유감이다. 말은 현실을 보상하는데, 그 보상은 현실의 결핍을 말로 대신한다는 뜻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결핍 자체가 말의 즐거움을 낳는 양분이라는 뜻에서의 아주 말라르메적인 보상이다(‘시는 언어의 결핍을 보상한다’는 말라르메의 말을 그렇게 해석한 것은 옥타브 마노니의 「정신분석가들을 위한 말라르메」였다).
그러나 독자의 이 발견은 다른 발견으로 이어진다. 말의 풍요 속에 감추어진 현실의 궁핍이라는 이 의미론적 구조는 이 작품을 드러난 것과 감추인 것의 변증법으로 이끈다. 그런데, 이 감추어진 것은 단순하지 않다. 앞에서 보았듯이 감추어진 것은 복수이며, 감추어진 것들 중에는 드러남 쪽에 가까이 있는 것(그래서, 작품의 표면적 주제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과 덜 드러난 것(일종의 허허실실, 작품의 주제를 위장하는 것)과 아예 감추어진 것(작품의 이면적 주제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 각각 있다. 이로부터 현실과 말 사이에, 그리고 말들 사이에 지속적인 착란이 발생한다. 그 착란은 작품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텍스트의 착란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큰 단위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그 착란을 열거해보기로 하자.

(1) 제목의 착란:이 소설의 발단은 <눈 내림>으로 시작되어 <눈 내림>으로 끝난다. 그것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눈』이 더 어울릴 법하다. 그러나 제목은 『홍어』이다. 눈 내림은 실제적인 사건인 데 비해, <홍어>는 암시적 연상체이다.
(2) 관점의 착란: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성장소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의 남편 찾기 소설이다.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난 주인공이 둘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나>의 성장사로 읽을 것인지 어머니의 수난사로 읽을 것인지 망설여진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두 관점 사이를 쉴새없이 왕복해야 한다.
이보다 더 작은 관점의 착란들도 또 있다. 이 작품의 한 주제가 <찾기>임이 분명한데, 찾는 자가 찾는 게 아니라, 찾음을 받는 자가 찾는 자를 찾는 전도가 빈번히 나타난다. 가령, 밤에 사라진 삼례를 찾아나선 <나>가 한참 헤매다가 <옆집 남자에게 훈육당하>던 중 등뒤에서 삼례의 외마디소리가 들려온다. <삼례가 오히려 나를 찾아나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러간 것>(p.75)이다. 얼마 후, 삼례를 다시 미행했을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내가 삼례를 미행했던 것이 아니라, 삼례가 나를 미행하고 있었다>(p.85). 나중에 집을 나간 삼례가 술집 작부가 되어 돌아왔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삼례를 찾아간다. 그런데, 내가 술집 앞에서 하냥 기다리고만 있다가 환각에 빠져들었을 때, <내 이럴 줄 알았지, 초저녁부터 찜찜하더라니깐>(p.147)하면서 <삼례가 나타난>다. 이런 <전도>(p.76) 외에도 나의 심리적 분신인 누룽지가 나의 개가 아니라, 옆집 개라는 것도 관점의 착란으로 읽힐 수 있는 예이다.
(3) 서술의 착란:『홍어』에는 사실주의적 묘사와 낭만주의적 감정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작품 속의 기호들은 아주 수미일관하게 짜맞추어져 있어서 작가가 정확성에 바친 열정과 시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기호들과 그 기호들이 실어나르는 주제들에는 이탈의 방만함이 넘쳐흐르고 있다.
(4) 결말의 착란:작품의 결말은 놀랍게도 아버지가 돌아오자, 어머니가 떠나는 것으로 메지나고 있다. 그 발상이 하도 충격적이어서 독자는 어머니의 가출이 <나>의 환각 속의 그것인지, 아니면, <나>의 가출의 전도된 표현인지, 아니면, 정말 어머니의 가출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혼돈 속에 빠진다.

나는 작가의 최근작 『야정』을 두고 <파열적 텍스트>라고 이름 붙인 바 있는데(「증발의 현상학, 회귀의 의미론」), 그 파열은 『홍어』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파열의 지속은 원-파열로부터의 이탈이 이 파열 속에 있음을 암시한다. 과연 꼬리가 길면 잡히듯이, 모색이 길면 의미가 잡힌다. 『야정』의 파열이 거의 무의식적이라면, 즉 작가의 의사에 <반하여> 나타난 것이라면, 『홍어』의 파열은 무의식적인 <기도>의 결과가 아닐까 추측하게 할 만큼 아주 조직적이다. 이 파열은 <사팔뜨기 눈>(p.291)을 한 자의 파열이지만, 동시에 사팔뜨기 눈으로 볼 때에만 정상인의 눈의 평면적 시각을 떠나 풍요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파열이다. 실로 사시(斜視)를 하고 이 작품을 열심히 바라본 사람은 작품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착란이 얼마나 다면적인 말들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지 스스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근대 한국인의 심성사와 그 심성사 위에서 산출된 한국의 역사적 소설들(작가 자신의 작품들까지 포함하여)에 대한 깊은 반성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분명 그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있으며, 한 마리 『홍어』를 품어 청명한 소택지를 부화해내는 즐거운 착란을 경험하고 싶지만, 그러나 의욕이 저만 애가 달 뿐, 몸이 전혀 따라가주지 못한다. 내 정신과 몸도 시방 착란 중이다. 그리고 그 착란은 불행하게도 조직적 착란이 아니라, 부정적 착란, 불수의적 착란이다. 아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