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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침묵의 집 - 박범신 『침묵의 집』속 남녀의 첫 만남들이 참으로 영상적이다. 그러나 아름다움 만큼이나 그 뒤에 파멸적인 그늘이 숨어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사항이다. 그것은 마치 청순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을 방불케한다. 아니 소년과 소녀의 만남 자체이다. 신열처럼 찾아온 삶의 자기 모멸에 극도로 시달리 즈음,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장감장감, 마치 어린 나비가 춤추듯"걸어가는 한 소녀를 본다. 그 소녀가 바로 천예린 시인이었고,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접어야 했던 화가의 꿈을 되살리는 소년이 된다. "그 만남에서 그녀가 내게 보여준 최초의 이미지는 소녀였고 노랑색이였으며, 두 번째 준 이미지는 깊은 눈자위에 서린 어두운 그늘이었고, 세 번째 준 이미지는 바로 그녀의 제안에 딸라 스케치북에 그린 옛.. 더보기
향기로운 우물 - 박범신 작품집을 펴낼 때마다 새로운 문학적 행보를 보여줄 수 있는 작가는 행복하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한 가열한 의욕이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십대의 연륜에 문학에 대한 가열한 의욕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은 이즈음의 문학풍토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가열한 의욕이 자기 갱신의 구체적인 직업으로 결실을 맺는 모양을 보여주기는 더욱 어렵다. 이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과시하는 젊은 작가들초차 문학에 대한 초조함과 위축된 마음가짐으로 나태와 관성에 안주하는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뚜렷하게 입증이 된다. 박범신은 1990년대 후반에 펴낸 소설집『흰소가 끄는 수레』로 새로운 문학적 출발의 성과를 인정받은 바 있거니와 불과 삼년.. 더보기
흰소가 끄는 수레 - 박범신 1. 아버지의 죽음과 문학의 내면화 90년대 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아버지­교사­지사로 대표되던 사회적 초자아(social superego)의 현저한 약화를 들 수 있다. 식민지시대와 동족상잔의 참화와 개발독재의 암흑기를 통과해오면서 우리 문학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단호하고도 금욕적인 부성의 압도적인 지배를 받아왔다. 대다수 작가들은 아버지의 법 아래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문학적 도정에 오르곤 했다. 부재하지만 현존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상명령과도 같았다. 그 아버지는 때로 이념의 광휘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현상하기도 했고 때로 복고적 가족주의의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간간이 부친살해의 욕망이 금기의 장벽을 뚫고 표출되기도 했지만 그 욕망 또한 깊이 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