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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소설 서평 /한국 현대 소설

재미나는 인생 - 성석제


나는 두루 찾노라. 그곳에서,

형적 없는 노래 흘러퍼져.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저기

그 누구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 는 소리

내 넋을 잡아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 김소월, 「무덤」 중에서


  요즘은 ‘소설을 쓴다’ 하지 않고 ‘글을 쓴다’ 한다. 줄여서 글쓰기란 말을 사용한다.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비디오 빼고 소설과 시 외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말인데 머리를 짜내본다면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소설’과 ‘시’라는 말 대신에 의식적으로 ‘글’이라는 말을 집어넣는 것이니까, 장르를 부정하는 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는 장르 고유의 공식에 맞추어 이것저것 엮어서 창작을 하는 식상한 행위에 대해, 그것은 관습적 행위에 불과하고 진짜 있는 것은 그저 쓰는 행위일 뿐이라고 대거리하면서 관습적이고 제도화된 행위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인만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허구일 수 없고 온몸으로 목숨 걸고 쓰는 것이라는, 그리하여 사실은 관습을 문제삼는 첫번째 문제의식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라는 추측이다. 이 또한 김수영이 말했듯이 문학을 하고자 한다면 온몸으로 할 것을 기대하는 소망의 표현인만큼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여전히, 만약 전자라면 왜 에쎄이로 나아가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고, 후자라면 굳이 그것을 글쓰기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우리 문학에서는 30년대에 ‘수필’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이후 수십년간 전통을 잃어버린(물론 김수영은 예외이다), 에쎄이적 글쓰기(이때야말로 글쓰기라는 말이 성립한다)야말로 첫번째 문제의식에 걸맞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모든 새로운 용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숨기고 있기에 ‘글쓰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한 사실상 뒤의 것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잃고 다른 차원의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김소월의 시에 죽음을 노래한 두 편의 작품이 있다. 하나는 「초혼」이고 다른 하나는 「무덤」이다. 「초혼」보다 「무덤」이 훨씬 감동적인데 그것은 “내 넋을 잡아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라는 단 한 구절 때문이다. 죽은자만이 산자의 영혼을 ‘끌어 헤내며 부르’는 것은 아니다. 다소 낭만적인 판단인지는 몰라도 내 속에 있는 또하나의 나, 내 넋과 영혼이 끌어 헤내며 나를 부르고, 이 영혼의 헤내어 부름에 형식과 운명을 부여하는 것이 소설이다. 자신의 영혼을 찾아 헤매는 것이 소설이라는 생각, 여전히 이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영혼의 헤매임이 운명으로까지 승화되었는가이며 또한 여전히 이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인 묘사와 인물의 깊이이다.

성석제의 『재미나는 인생』은 몇 컷짜리 만화를 보는 듯한, 일종의 꽁뜨(구태여 엽편‘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로서 원고지 2,30매의 분량으로 주로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을 희극적 묘사와 반전이라는 구성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들을 그리면서도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예를 들어 「성탄목」의 ‘나’는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무시하고 담배 한대 피우려고 산속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산악구조대원 겸 전투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무조건 정상까지 달음박질치고 급기야는 그들에게 붙잡히는데, 예상했던 욕설 대신에 오히려 “조난자를 구조하면 휴가를 갈 수 있다고”(29면) 감사를 받게 된다. 또 「외로운 사냥꾼」은 여권 발급용 서류 하나를 놓고 무척 까다롭게 구는 시청 직원의 모습이 제시되다가, 막상 일이 마무리되자 서운한 목소리로 꼭 여권이 나왔나 확인하고 오라고 당부하는 애처로운 모습, 이에 대한 ‘나’의 “그 역시 나처럼 외로운 인간”이라는 깨달음이 제시된다. 이 반전들은 모두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포용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 내용 또한 웃으면서 지나쳐버릴 수만은 없는, 우리들 뇌리 깊이 자리잡고 있는 피해의식과 고독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나는 인생』이 야기하는 웃음은 심각하기를 거부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웃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우월한 인식을 갖고 있는 자가 어리석은 타인의 전복, 그 어리석음을 바라보는 웃음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웃는 웃음이 그것이다. 후자야말로 진정한 웃음이며 우리의 몸에 육체화된 인식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나오는 웃음일 것이다. 그러나 『재미나는 인생』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하나 더 등장시킴으로써 이와같은 두 가지 종류의 웃음을 넘어서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어이」는 이 시선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해를 마감하는 자리에 친구들이 모였는데, 항상 늦는 친구가 그날도 늦게 오자 한참을 기다리던 친구들은 식사를 시작하며 그 친구가 항상 연발하는 ‘어이’로 말장난을 하다가 정작 그 친구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때 그 친구는 아무런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잡담 그만! 여러분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우리 지난 한 해 일은 모두 잊고 새해에 다들 잘해보자……” 그러면서 그는 술잔을 들고 우리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감탄사를 익숙하게 내뱉었다. “어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길지도 짧지도 않으며 천박하지도 않고 뽐내는 것도 아닌. 그지없이 자연스런 그의 ‘어이’에 우리는 모두 말을 잃고 넋을 빼앗겨 일제히 술잔을 높이 받들어 모실 수밖에 없었다. 위하여 어이!(117~18면)

  세 가지의 ‘어이’가 존재한다. 하나는 (친구들이 바라보는) 항상 늦는 친구의 ‘어이’, 그들이 깨닫고 있듯이 이는 유아어 ‘응’에서 나온 말로서 “어지간한 말로는 사람 말을 말로 듣지 않는 시대의 서글픈 부산물”(116면)이다. 두번째는, 이를 비꼬면서도 그러한 감탄사를 발할 수밖에 없는 현실 또한 알고 있는 친구들의 ‘어이’이다. 마지막 하나는 이 모든 것을 제압하고 늦게 왔으면서도 왕자처럼 좌중을 사로잡는 또하나의 ‘어이’이다. 각각의 ‘어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각각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첫번째 시선의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서글픔을 느끼는 두번째 시선에 그치지 않고 이를 다시 한번 조롱하는 세번째 시선을 설정함으로써 『재미나는 인생』은 모든 심각한 웃음, 인생의 페이쏘스를 자아내는 웃음을 부정한다. 이 제3의 시선을 설정함으로써 「고독」 「변기」 「번호」 등은 아예 더 나은 인식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가벼운 웃음을 목표로 하거나, 「재미나는 인생」「거짓말에 관하여」 「어이」 「재미나는 인생」「폭력에 관하여」 등은 풍자를 시도하면서도 그 풍자하는 시선 또한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독특함이 꼭 장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제3의 시선을 항상 전제함으로써 「재미나는 인생」「뇌물에 관하여」 「경지」 「시간과의 여행」 등 현실과 그릇된 신념에 대한 풍자의 내용을 담은 작품이 그 어떤 뚜렷한 대안적 인식을 상정하거나 한층 강한 비꼼이나 풍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장수」 「외로운 사냥꾼」 「당신 몇살이야」 등 인생의 페이쏘스를 그려내는 작품이 좀더 심각한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 꽁뜨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부질없는 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거짓말에 관하여」처럼 삶이란 모두 거짓말이라는 식의 무책임함이나 「나 혼자 가본 곳」 「그해 겨울의 파란 불꽃」처럼 자족, 긴장의 상실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애환과 우여곡절이 증폭되어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내면과 영혼, 이를 담을 수 있는 형식은 아니라는 점 역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이 이루어내는 경지, 운명이란 무엇일까? 최소한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삶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역마살이 있다는 식의, 그러니까 김동리의 「역마」 식의 운명도 아니고 혹은 삶은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그러니까 도대체 벗어날 수 없는 미망에 불과하다는 식의 운명도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사회적인 것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이 처한 조건에 역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그려내는, 더이상의 길을 발견할 수 없는 노력이 전제된, 그러고 나서 발생한 어쩔 수 없음이다. 그리고 최소한 그 긴장감을 잃지 않고 반어적으로라도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것은 소설쓰기라고 불릴 수 없다.
우리들에게는 떠도는 영혼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발견하지 못하여 방황하거나 자기 위안 속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버리거나 아예 모른 체하는 무책임에 머물러버리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이 이루어놓았던 촌철살인과도 같은 에쎄이 정신의 뒤를 잇는 것이라면, 그래서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면 굳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취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며 글쓰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범람하는 담론들에 현혹되어 결국은 현실과 삶으로 육박해들어가는 힘겨운 고투를 포기한 채 손쉽게 새로운 담론으로 이전의 담론을 대체하거나, 영혼을 아예 포기한 채 메마른 삶을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다

조현일

창작과비평. 1997 여름 「소설과 영혼에 대하여」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