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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소설 서평 /한국 현대 소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은희경

 

은희경(殷熙耕)은 이른바 '신세대작가'들 중 예리한 문제의식과 섬세한 감수성을 겸비한 드문 경우이다. 서두에서 평자는 신진작가들의 문학에서 눈물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지만, 은희경의 문학에는 그 눈물이 있다. 은희경 문학의 냉소주의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은희경의 냉소 속에는 분명 눈물이 배어 있다. 평자는 이 점이 은희경 문학의 진실성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그녀의 첫 장편 『새의 선물』에서도 그 눈물이 확인된다.

『새의 선물』은 형식적으로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와 같은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새의 선물』의 실질은 성장소설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많은 논자들의 분석처럼 성장이 없기 때문이다. 성장이 부재한 성장소설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란 점에서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 소설에 성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주인공이 크기도 전에 미리 '세상의 이면'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새의 선물』은 김승옥이나 최인호의 악동소설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새의 선물』의 악동소설적 면모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분리에서 드러난다. '보여지는 나'가 외적 자아라면, '바라보는 나'는 '보여지는 나'를 규율하고 조종하는 내적 자아이다. '바라보는 나'는 세상의 추악한 이면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바라보는 나'에 의해 조종되는 '보여지는 나'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행동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린애에 대한 세상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특유의 지독한 냉소주의는 내적 자아인 '바라보는 나'의 특징이다. 작품이 이것으로 끝난다면 눈물 운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라보는 나' 자체가 분열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분리는 외관과는 달리 그렇게 철저하지 않다. 종종 둘은 서로 자리를 맞바꾼다. 특히 이모를 향한 홍기웅의 순정을 보며 '바라보는 나'가 느끼는 심정은 도저히 냉소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보여지는 나'에게서 나타나곤 하던 순결성에 가깝다. 이러한 자리바꿈은 '바라보는 나'의 이중성에서 기인한다. '바라보는 나'는 외부로 드러나는 냉소적 자아와 내부에 숨어 있는 순결한 자아로 분열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숨어 있던 순결한 자아가 특정한 순간에 불쑥 외부로 표출되면서 자리바꿈이 벌어진다. '바라보는 나'의 이중적 분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애매모호한 경계, 이것은 이 소설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틈인 동시에 진실성을 향한 동경의 흔적이다. 눈물은 바로 그 흔적 속에 배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의 선물』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진실한 세계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이고 있는 소설이다. 이 줄타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냐에 따라 은희경 문학의 방향이 정해지는 셈인데, 첫번쩨 작품집 『타인에게 말 걸기』에서는 냉소주의로의 경사가 두드러져 보였다. 그래서 평자는 이 작가도 눈물 없는 비관주의로 빠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진실성에 대한 동경 쪽으로 다시 방향을 튼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변화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멍」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한현정의 남편 영규는 그야말로 무능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래서 친구들 또한 그를 멀리한다. 그의 사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일 정도로 영규는 거짓말과 허장성세와 뻔뻔스러움으로 점철된 생활을 반복한다. 그런데 정작 가장 큰 피해자인 한현정의 생각은 다르다. 영규에 대한 깊은 사랑은 한현정이 쓴 자전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모두가 영규를 나약하다고 욕하는데도 그녀는 반대로 그가 "자신을 내팽개칠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고 옹호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영규의 약점이나 결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약점들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그에 대한 사랑이 워낙 깊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규에 대한 한현정의 사랑은 이 시대에는 찾기 힘든 문자 그대로 낭만적인 사랑이다.

낭만적 사랑은 비현실적 사랑이므로 현실과 접촉하면 패배하기 마련이다. 소설에서도 그녀의 사랑은 남편의 자살로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멍」이 정작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패배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한현정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분명 낭만적 사랑의 실현가능성을 믿지 않는 쪽이다. 은희경 특유의 냉소주의는 이러한 불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멍」을 통해 말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동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한번 '바라보는 나'의 이중성으로 되돌아가보면, 그것은 '바라보는 나'의 내적 자아와 이어진다. 말하자면 낭만적 사랑에 대한 동조는 바로 작가의 내밀한 무의식의 발현인 것이다.

사랑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동경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도 그중의 하나이다. 줄거리 자체는 다분히 통속적이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주인공, 아버지의 외도로 고통받는 어머니,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주인공의 자각, 남의 행복을 깨지 않기 위해 유부남과 헤어지는 결말. 그러나 이러한 멜로드라마적 연애담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 싶어하는 것은 예의 사랑의 진실성이다. 주목할 점은 이때의 사랑이 한 남자에 대한 한 여자의 사랑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좀더 넓은 맥락의 사랑, 곧 '나의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랑은 사회적 지평으로의 확장가능성을 지닌 사랑이다. 평자가 이 작품을 진정한 사회적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소설로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이 남자를 포기하는 결단의 바탕에는 사랑의 사회성에 대한 깨달음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인 마이 라이프」에서도 진실한 사랑에 대한 은희경의 모색이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사랑하면서도 결혼하지 못한 두 연인에 관한 짧은 삽화는 사랑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두 연인은 만나기만 하면 결혼하지 못한 것이 상대 탓이라고 우기며 싸운다. 싸움의 결말은 언제나 이별인데,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서로 못견디게 그리워져 다시금 만나고 또 싸우다 헤어진다. 만남-싸움-이별-만남을 반복하는 두 연인의 운명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행로를 상징한다. 사랑의 성취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하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그만큼 깊고 질기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그토록 깊은데도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속물성과 보수성이 그 이상으로 완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삽화가 전하는 메씨지는 개인의 진실과 사회의 허위 사이의 악순환적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 대립을 관망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슬플 때만 살아 있는 것 같거든요"라고 말함으로써 단호하게 개인의 진실을 편든다. 이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은희경의 열망이 의외로 강렬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이번 소설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전작과 달리 진실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있다. 특히 진실한 사랑을 향한 끈질긴 모험을 통해 현대사회에 두텁게 드리워진 소통단절의 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다. 이 점이 이 작품집이 이룬 소중한 성취이고 앞으로 기대를 걸게 하는 근거이다. 냉정히 돌이켜보면, 90년대의 한국문학은 눈물 없는 비관주의와 허망한 냉소주의를 남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불모성에 대한 예술적 반발의 일환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90년대 한국문학 전체를 황폐하게 만든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은희경의 변화는 21세기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싹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답답함 하나는 은희경의 문학세계가 단독자의 영역에 여전히 유폐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 작가는 좀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일까. 개인의 삶을 몽땅 사회로 환원하는 것도 문제지만, 개인과 사회의 연관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 또한 세계에 대한 일면적 이해이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모더니즘의 '최선의 전통'들은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과 사회의 연관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은희경이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기를 바란다면 시대의 조류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발상일까.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이 표명하는 좀더 넓은 맥락의 사랑,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조심스러운 관심에 더욱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정일

창작과비평 1999. 여름호「눈물 없는 비관주의를 넘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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